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Ju 87 (문단 편집) == 평가 == 이러한 슈투카의 활약과 전과는 독일 공군이 [[육군]]을 지원하는 [[근접항공지원|전술 공군]] 즉, 날아다니는 대포에 머물렀다는 상징이며, 이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은 전략적 목표를 공격하는 전략 공군으로 변모하지 못했고, 전선 후방의 적군 산업시설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패배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독일 공군이 전술 공군에 머물렀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이는 슈튜카가 맹활약을 한 결과가 아니라 독일 공군의 태생 자체가 전술 공군에 그쳤기 때문이다. 독일 공군의 주력 전투기로 활약했던 Bf 109 전투기도 전술 공군의 컨셉(짧은 항속거리 등)에 맞춰서 설계된 전투기였다. 만약 독일 공군이 전략 공군이었다면 Bf 109가 주력이 아니라 장거리 호위기 컨셉인 [[P-51]] 비스무래한 놈이 주력 항공기가 되었을 것이다.[* 다만 연합군도 장거리 호위기(머스탱)과 단거리용 전투기(스핏파이어) 같이 썼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Bf 109는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 생산은 되었을 것이다.] [[헤르만 괴링]]이나 [[발터 베버]] 등 육군 항공 출신의 장성들은 공군의 체질을 바꿔 본격적인 중폭격기를 갖추려 하였다. 그러나 베버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독일 공군은 전략 공군으로 바뀔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육군 [[포병]] 출신인 [[알베르트 케셀링]]을 포함한 지상 전투병과 출신의 장성들의 생각이 공군은 육군의 도우미에 그쳐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케셀링이 공군의 수장은 아니었고 공군의 최고사령관이었던 괴링은 공군이 전략 공군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으나 케셀링 등의 지상전 출신 장성들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고, 본인이 딱히 적극적으로 전략 공군을 추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전술공군 전략공군의 문제는 단순히 장성들의 의지 문제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전략공군을 세울 의지가 있다 한들 그것을 받쳐줄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대전 중에는 미국이 아닌 어느 나라도 전략공군이란 개념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그나마 영국이 전쟁말기에 들어서 전략공군이라는 개념에 어느정도 근접하기라도 했지만 공습 범위를 야간 공습으로 한정하고 폭격 대상도 미국처럼 광범위한 게 아니라 쾰른이나 함부르크같이 몇몇 중요 도시만을 골라 집중적으로 폭격하는 전략을 쓰는 등 근본적으로 미국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다못해 미국조차도, 당장 B로 시작되는 폭격기들의 개발만 하더라도 원자폭탄 이상 가는 비용이 들었다. 그러니 단순히 독일이 근시안적으로 전술공군을 고집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